류성룡의 징비록으로 만나는 임진왜란 이야기
머리말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어난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큽니다. 이번 장에서는 임진왜란의 배경과 원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조선시대의 시대구분을 임진왜란으로 할 정도로 임진왜란은 우리역사에 큰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에 더욱 성리학이 보수적인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광해군 이후에는 '존명배청'과 소중화를 왜치며 '정신승리'를 하게 된다. 왜라고 불렀던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도예가 발달하게 되었고 상업이 발달해 경제가 활성화되어 에도시대의 상업은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 조선은 왜 임진왜란에서 선조가 몽진까지 가야만 했으며 온 강토가 쑥대밭이 되도록 일본에게 처참히 패배를 해야만 했는가 그 이유를 류성룡의 《징비록》에서 알려준다.
임진왜란의 배경과 원인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어난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큽니다. 이번 장에서는 임진왜란의 배경과 원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조선시대의 시대구분을 임진왜란으로 할 정도로 임진왜란은 우리역사에 큰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에 더욱 성리학이 보수적인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광해군 이후에는 '존명배청'과 소중화를 왜치며 '정신승리'를 하게 된다. 왜라고 불렀던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도예가 발달하게 되었고 상업이 발달해 경제가 활성화되어 에도시대의 상업은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 임진왜란의 배경은 조선의 200년간의 평화가 가져다준 안보의 나태함, 일명 '안보불감증'이 퍼져 있어 제일 크게 얻어맞았던 '을묘왜변'이 준비의 기준이 되었다. 15만이나 상륙할 줄 몰랐던 것이다. 두번째로는 제승방략과 진관체제 그 자체의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진관체제는 수령이 주변고을 규합해 소규모 전투에서는 유리하나 대규모 전투에서는 불리하다는 그 한계점을 갖고 있었다. 또한 제승방략은 중앙에서 장군을 파견해 파견장수를 중심으로 고을에서 군사를 소집해 전투를 치르게 하는 방식이었는데 훈련도 잘 안되었을 뿐더러 농경기에는 농사를 지어야 하는 조선에는 그 한계가 명확했다.
셋째는 당파싸움이다. 조선통신사를 보냈을 때도 돌아오고 나서 혼란스럽게 김성일이 (일본)절대 처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거짓보고'를 해서 선조가 안심을 한게 없지 않았다. 일치단결해서 의견이 일치된 보고를 했다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이다. 다이묘들에게 분봉해줄 땅이 부족해 처들어간 전쟁이니 만만한 조선을 처들어 간 것일 것이니 이 전쟁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조선의 지략가, 류성룡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쟁에서 조선은 어떻게 자신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은 조선의 지략가인 류성룡에게 있었습니다. 류성룡은 조선시대의 유명한 지략가로서,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의 방위와 전략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업적과 역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첫째는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둘이 임진왜란의 3대대첩 중 2개인 한산도 대첩과 행주대첩을 이끈 것을 보면 류성룡의 그 혜안은 놀라울 따름이다. 두번째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 5위로 편제되어 있던 중앙군을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5군영으로 전환될 기반을 마련하였고 무었보다 군질을 높였다는 의의가 있다. 세번째는 체찰사겸 영의정으로 조정일과 군대 일을 도맡아 '전시재상'으로서 발로 뛰었으며 조명 연합군 시기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의견조율을 하는데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징비록의 탄생 배경과 의의
임진왜란을 기록한 가장 중요한 역사서인 징비록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요? 징비록의 배경과 그의 의의에 대해 알아보겠다. 서경에 "역사를 알고 미래를 대비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약칭으로 이를 줄여 이름을 '징비록'이라 책 이름을 류성룡이 정했는데 이는 임진왜란의 7년 전쟁을 반면교사해 더 나은 조선을 만들어주길 희망했던 마음이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류성룡이 탄핵당한 이후 집필을 더 열심히 신경썼는데 징비록의 탄생에는 임진왜란을 통한 류성룡의 경험과 우리민족의 통한의 슬픔이 모여져 만들어진 '반면교사' 삼을만한 사서 라고 생각이 든다. 그런데 당대에는 일본에서 더 유행했다고 하니 아이러니이다.
임진왜란 초기의 전투와 조선의 대응
임진왜란 초기에는 조선이 일본의 강력한 공격에 직면하였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임진왜란 초기의 전투와 조선이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조선이 처한 어려움과 그에 대한 대응은 상주의 이일이 너무나도 한심히 부산에서 상주 근처까지 와있는지도 모른채 만나자 마자 자기 홀로 충주까지 후퇴하고 충주 신립은 또 '조령'이 넘어 갔다는 말을 부하 장수에게 듣자 열을 내며 '거짓보고를 했다'며 죽이니 탄금대에서 장렬히 전사 하는 것이 매우 한심해 보이는 장면이 징비록에서 많이나온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신립같은 장군이 있고 이일 같은 장군이 있을 걸 생각해 보면 남일 같지 않아보인다.
왜군의 진격과 조선의 저항
임진왜란이 진행되면서 왜군은 계속해서 전진하고 조선은 저항해야 했다. 왜군의 진격과 그에 대한 조선의 저항이라 하면 수군 빼고는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의병과 관군이다. 의병은 곽재우와 김천일, 사명대사같은 이름있는 의병을 필두로 백성들이 같이 힘을 모아 왜군들을 물리쳤다. 수군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권율장군이 행주대첩을 일궈낸 것과 진주목사 김시민의 진주혈전이 큰 역할을 했다. 행주산성에서 막아 북진을 저지시켰고 진주성에서 막아서 호남지역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해전의 영웅 이순신과 그의 역할
임진왜란에서 가장 두드러진 영웅 중 한 명은 이순신 장군이라 할 수 있다. 이순신은 명량대첩, 한산도대첩, 옥포해전 등에서 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옥포해전과 한산도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학익진'을 활용한 '일시집중타'에 그 비결이 있다. 일시집중타는 현대전에서도 중요한 방법으로 알려져 있는데 육전에서 활용되는 학익진을 수군에 끌여들여 일시집중타를 노린것도 대단한데 견내량에서 거북선으로 유인해 내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긴 한산도 대첩은 그 중 백미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승전보는 수군의 단순한 승전보에서 의미가 그치지 않는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라 해도 '보급'인데 왜군의 상륙한 병사들에게 보급의 차질이 생기면서 조선에게 희망을 주기 시작한다.
맺음말
징비록은 선조수정실록을 제외하면 난중일기와 더불어 개인이 쓴 사서로서 그 가치가 굉장히 높다 할 수 있다. 우리의 현 시대도 까닥하면 임진왜란 판국이 벌어질지 모른다. 항상'징비'할 자세를 취하고 징비록의 그 답답한 사람들이 내가 되지 않도록 신경쓰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책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순신 장군이 어떻게 보면 유도리 없어보일지 몰라도 그런 대쪽같은 면모 때문에 우리가 또 존경하는 것 처럼 말이다.